- 그 별빛을 받아 일렁거리는 한강의 잔물결

“1984년,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운행을 멈췄던 순간을 기억하며”
-p9<1984년, 우주의 모든 별들이 운행을 멈췄던 순간을 기억하며>
한 소년이 있다. 이름은 김정훈.
1970년, 폴 매카트니는 비틀스의 해산을 발표했고, 아폴로 13호는 달로 향했고, 이스라엘의 전투기가 수에즈 운하 근처의 국민학교를 폭격했고, 스코필드 박사가 운명했고, 그리고, 그리고, 김정훈이 태어났다.
1984년,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지구가 콩알처럼 작아질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줬고, 이스라엘의 초능력자 유리 겔러가 한국을 방문해 숟가락을 구부렸고, 그래서, 정훈은 숟가락을 구부렸고, 그래서, 정훈은 고아가 되었다.
원더보이. Wonder Boy.
Wonder
v.
1. 궁금하다, 궁금해하다; …할까[…이 어떨까] 생각하다
2. (정중한 부탁·질문에서) …일지 모르겠다[…일까 생각하다]
3. (크게) 놀라다
n.
1. 경탄, 경이(감)
2. 경이(로운 것), 불가사의
3. (솜씨·효과가) 경탄스러운 사람[것], 기적(과 같은 것)
하나밖에 남지 않은 식구였던 아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던 간첩의 차와 아버지의 트럭이 부딪혀서 죽었고, 정훈은 어떠한 빛을 보고 초능력을 얻었다. 권대령은 아버지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했다 말하지만 그런 것은 정훈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정훈은 단지 아버지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국민들은 정훈에게 ‘원더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더보이’는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만났다. ‘송년특집 원더보이 대행진’에 나갔다. 청와대와 방송국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고 (물론 대통령은 빼고) 국민들을 눈물 흘리게 한다. 권대령은 정훈을 재능개발연구소에 끌려가 불쌍한 사람들을 고문하는 데 그의 능력을 쓰려 한다. 마스터 피터 잭슨을 만나 근원과 빛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 대학교에 가서 선재 형을 만난다. 강토 형을 만나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무공 아저씨에게 삶의 방법을 배운다. 재진 아저씨와 강토 형을 도와 책을 만든다. 그리고 재진 아저씨의 도움을 얻어 어머니를 찾아낸다. 강토 형, 아니 희선 씨의 분신을 막는다.
‘원더보이’는 시대를 이야기한다.
‘원더보이’는 한 소년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하늘을 얘기하지 않고서는 철새에 대해 말할 수 없듯이, 이 둘은 함께 하는 이야기이다.
정훈은 궁금해한다. 이 세상에는 정훈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간첩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자신이 원더보이가 된 이유, 청와대에서 읽었던 “살인마!”라는 마음속의 목소리, 정보부에서 죽어간 사람들, 사람이 죽은 뒤에 가는 곳,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의 대자보, 그리고 분신.
정훈은 경이로운 ‘원더보이’이지만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다. ‘원더보이’는 이런 정훈의 시점을 빌어 시대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더보이’는 시대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이 끝날 때까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두 ‘전’ 글자 중 단 하나의 ‘전’도 코빼기를 비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원더보이’는 시대를 이야기한다. ‘원더보이’의 장소, 이름들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대한 단서들을 쥐어 준다.
어떤 책들은 주인공이 시대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선 그 모습을 비춘다. 허나 ‘원더보이’는 다르다. ‘원더보이’는 바로 옆 들판에 허리케인이 지나가는 작은 도로를 걸어가는 이야기이다. 서울의 광화문 사거리에서부터 전라남도의 농촌마을 신기리까지 국도를 따라 걸어가는 여정,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보이는 예술 작품, 책의 제목, 사람의 이름, 장소들을 적어 두었다. 그 단어들이 써 있던 쪽들마다 표시를 해 놓고, 노트북을 책상의 왼쪽에, 단어들을 적어둔 쪽지를 오른쪽에 두고 단어들을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변대웅,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베니스에서의 죽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적과 흑, 폭풍의 언덕, 베드로의 집...
단어 하나하나에는 깊은 의미가 배어 있었다. 서울의 봄, 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상계동 철거...소년이 방황했던 그 길은 바로 시대의 한 자락이었던 것이다.
1986년 초봄,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에 붙은 대자보를 보며 정훈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제 1986년 초봄, 거기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에 붙어 있던 대자보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이 떠올랐다. “한 가지만 약속해달라. 여러분은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우리는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라고 말하지 말아달라.” 2011년 월가 점령 시위에서 68혁명에 대한 언급 중 나온 말이다. 혹시 이 문장이 김연수 작가가 80년대, 그 시대에 대하여 정훈의 입을 빌려 하고 싶던 말이 아니었을까. 2012년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들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로 떠올리는 것.”
-p98<어떻게 나는 새로 사서 처음 입었다는 이만기의 양복 상의에 토하게 됐는가>
“나도 오래전에 그 빛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야. 네가 본 것처럼 더없이 환한 빛이었어. 그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을 만큼 따뜻한 빛이기도 했어. 하지만 나는 그 빛 속에 사랑했던 사람을 남겨두고 혼자서 돌아와야 했지. 텔레비전에 나온 너를 봤을 때, 그때의 내가 생각났어. 어쩌면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너였는지도 몰라. 그래서 지금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인지도 몰라. 지금 내게는 너의 그 초능력이 너무나 필요하니까 말이야.”
-p136<우리의 얼굴이 서로 닮아간다는 것>
또한 ‘원더보이’는 상실에 대한 책이다. 각자 잃은 것이 있던 사람들. 정훈, 강토 형, 무공 아저씨는 서로를 만나며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를 채워나간다.
‘원더보이’의 서사 구조는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길을 잃어버려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미로라던지, 아니면 계속 걸어가다 보면 전에 만났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놀이공원의 거울의 방과 같은 짜임새라고 느꼈다. 전반부에 언급되었던 작은 소재, 사건, 문장 하나하나가 후반부 인물들의 배경, 과거, 사건들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쉬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꿈결같은 초현실적인 문장들의 바다를 헤쳐가며 단어들을 잘 건져 옆에 놓아 두고, 생각의 바다 속에 낚싯줄을 드리워 놓은 뒤 그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며 읽어나가다, 한참 뒤에 낚싯대를 들어올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다.
러시아 소설가 안톤 체호프는 이렇게 말했다. “달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에 비치는 한줄기 빛을 보여줘라.” 이 유명한 글귀는 소설, 이야기를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 나는 이 글귀를 ‘원더보이’에 대한 것으로 바꿔 써 보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의 머리 위에는 하늘밖에 없고, 그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빛들, 그 별빛을 받아 일렁거리는 한강의 잔물결. ‘원더보이’는 별빛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별빛을 받아 일렁거리는 한강의 잔물결을 노래한다.
2020학년도 국어과 서평쓰기 수행평가.
2021.7.25 수정.
글이 나름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간 부족으로 계획서 서식 중 몇 부분을 빠뜨려 감점받았던 가슴아픈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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